--열화당 미술문고 "폭풍의 화가 변시지"
풍경과 인물속에 형상화된 인간존재에의 연민과 우수
동시에 출간된 열화당 미술문고 "변시지"(서종택 지음)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장소현 지음)는 '예술과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를 지향해온 열화당 미술문고의 기획저작이다.
이미 발간된 세잔느, 로트렉, 마티스, 뭉크, 김환기, 이쾌대, 장욱진에 이은 작가론 시리즈로서 국내외의 저명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관점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쉽게 풀어 쓰고 친근하게 그들의 예술세계를 접할 수 잇도록 한 이 문고는 최근 "폭풍의 화가" 변시지와 "인간적 체취와 관능의 화가" 모딜리아니의 생애와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과 이태리의 두 화가 변시지와 모딜리아니는 그러한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우수로 가득 찬 그들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예술사의 영원한 테마이자 탐구대상인 '인간'에게 그들의 방법론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일 수 없으며, 그들의 이러한 예술적 성취가 거침없는 개성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변시지(1926~)는 제주출생의 금년 75세의 원로작가로서 주로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말을 그린다.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 가는 초가와 소나무 한 그루와 마침내 이 모든 것을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 그의 이러한 풍경 속에는 어김없이 구부정한 한 사내가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데, 이러한 변시지 회화의 기본 구도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이 고즈넉하게 녹아 있다. 화면 전체가 장판지색 혹은 건삽한 황토빛으로 처리되어 있고, 풍경과 인물은 먹선의 고졸(古拙)한 맛과 역동성(力動性)이 함께 어울려 장대한 대자연의 율동으로 형상화된다. 제주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 23세에 일본의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하여 화제를 모았던 그는 귀국하여 서울대, 서라벌예대, 교수를 역임하다 다시 제주로 돌아간다. 실로 40여년만의 귀향이었다.
저자 서종택 교수(고려대)는 이 책에서 "....어설픈 서구 추수의 모더니즘 속에서 자기 예술의 정체성(正體性)을 찾는 일의 지난함은 제주-오사카-동경-서울-제주로 이어지는 작가의 고향회귀의 과정이 잘 말해 준다. 변시지 예술의 구도자적(求道者的) 순례는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마침내 황토 빛으로 열렸으며 그것은 이제 그의 사상이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바라보는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어떤 높은 경지에 와 있는 듯 하다. 변시지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결론 짓고 있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는 " 목이 긴 여인상"으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화가이다. 그는 끈질기게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그리고 조각한 화가였다. 학창시절이나 말년에 그린 몇 점의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작품이 인물화였고 그것도 대부분이 구체적인 인물을 그린 초상화였다는데서 앞의 변시지와는 대조된다. 거침없이 흐르는 우려한 선과 조각적이고 견고한 형태, 풍요롭고 정감이 넘치는 색채,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강하게 전해오는 것은 작가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며 이 애정을 통해서 느끼는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연민이다. 모딜리아니는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의 눈과 코와 입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따스한 연민과 우수를 전달한다. 한 점 기호로 처리되어 바닷가에 한마리의 말과 함께 바람을 마주하고 서 있는 변시지의 인물과는 크게 다르다.
변시지가 인물을 풍경의 일부로 원경 처리하여 존재의 고독감을 표현하였다면, 모딜리아니는 인물을 화면 중심으로 불러들여 디테일한 표정과 묘사를 통하여 인물들의 우수와 연민을 드러 냈다. 이들은 방법론적으로 다르지만 인간존재에 대한 고독감과 연민이라는 핵심적 주제에서 함께 만난다.
모딜리아니는 사람만을 그린 화가였다. 전통적인 의미의 초상화는 특정한 사람만을 기념하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래서 명령이나 주문에 의해 제작되거나 주문주의 마음에 들도록 미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상화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어서 많은 사람을 위한 감상용 미술이 아니다. 이 책은 모딜리아니의 예술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시대구분을 바로잡고, 모딜리아니 예술의 사색적 분위기, 관능적 아름다움, 그의 우정과 사랑, 화가로서의 천재성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저자 장소현(미술사)은 모딜리아니 예술의 우아함 속에 스며든 엄격함, 민첩함 속에 스며든 태연함, 애매함 속에 스며든 순수함, 근대정신속에 스며든 이탈리아주의를 거론하면서 자연과 대상을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고 강한 조형의지를 가지고 화면을 통제하며,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곡선을 간결하고 명확한 것으로 발전시키며, 과장된 단순함과 견고한 구축성을 인간의 심리적인 특성을 강조하며 끝까지 인간성의 추구가 주된 목적이었던 모딜리아니 작가정신을 들고 있다.
가령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화 <안나즈보로프스키> 같은 작품은 초상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을 잘 드러낸 걸작이며, <부채를 든 루나 체코프스카>는 "모딜리아니의 생애 마지막 성화"로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러한 한편으로 <폴 기욤> <장 콕토> 등의 모델들에게서는 야심적인 면과 속물적 요소, 잠재적인 신경질 등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낸 인간의 얼굴에서 세상을 읽도록 해 준다. 그는 어떤 모델을 그리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분석하여 자기화한 작가였으며 그의 형태의 구조나 형식 등에서 항상 조형적 언어로 초상화를 제작했다.
목을 길게 빼고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 모딜리아니의 인물들은 얼핏 보기에 감미롭다. 그러나 거기에는 깊은 슬픔과 아릿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변시지의 그림 역시 엇핏 보기에 제주의 풍물이 시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갈매기와 바닷새와 쓰러져가는 초가, 바람 혹은 태양을 마주하고 망연히 서 있는 사내 - 이 소재들은 그러나 인간존재의 근원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부수적인 소도구일뿐 제주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냄 풍물시가 아니다. 풍경으로 처리된 변시지의 인물과, 화면 중심에 확대 조명된 모딜리아니의 인물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수였고 그 표현의 저돌성은 모두 아름답고 개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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